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박태준 기념관

POPUP

청암 박태준

청암의 고향인 임랑마을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청암의 삶이 녹아있는 은유화된 건축물
그의 인생과 철학을 살펴보고 자신을 비추어 보며 사색에 잠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

인터뷰/연설문

연설문 게시글 상세 보기

월간중앙 인터뷰 요지
  •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4-04-22(월)
  • 조회 32
월간중앙 인터뷰 요지

지난 2000년 5월 총리직에서 물러났던 박태준(朴泰俊,75) 전 국무총리가 2월 8일 오후 귀국했다.
朴 전총리는 취임 4개월 6일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주로 미국과 일본에서 머무르면서 지난해 3월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 조문(弔問)차 입국하는 등 모두 세차례 일시 귀국을 한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회장 조문 이후 9개월만인 이번 귀국은 그 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朴 전총리는 지난해 7월 미국 코넬대학병원에서 폐 아랫부분에 난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정식 명명이 “늑막섬유증”인 이 혹을 제거하느라 5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은 미국 뉴욕과 일본 후쿠오카에서 요양을 해오다 이번에 귀국을 한 것이었다.

수술 후 첫 귀국이었던 터라 그의 건강을 궁금해하는 많은 사람들이 김해공항으로 환영을 나왔다. 전현직 포항제철 임직원 등 3백여명이 공항 의전실 주변을 가득 매웠다.
지방선거와 대선을 앞두고 있는 정치권도 그의 귀국에 큰 관심을 보였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박지원(朴智元) 정책특보를 보내 건강하게 귀국한 것을 축하했고,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는 박희태(朴嬉太), 강창희(姜昌熙) 두 부총재를 내려 보냈다.
자민련에서도 북준병(朴俊炳) 부총재와 한영수(韓英洙) 고문이 마중을 나왔다.
일본에서부터 수행한 조영장(趙榮臧) 전총리비서실장, 국무조정 실장을 지낸 최재욱(崔在旭) 전 의 원, 박 전 총리의 동향 출신인 김동주(金東周) 전의원 등의 모습도 보였다. 박 전 총리가 미국 뉴욕에 머물면서 자신의 친형이 당회장으로 교회에 출석한 게 인연이 돼 평소에도 집안ㄲ리 자주 왕래해온 민주당 김민석(金民錫)의원도 공항에 모습을 나타냈다.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공항에 도착한 朴 전총리는 환영 나온 인사들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로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는 박지원 대통령 특보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소통령’이라고 하던데, 이왕이면 그보다 더 높은 ‘중통령’이 더 낫지 않소?”라고 말해 박 특보로부터 “총리님, 왜 이러십니까”라는 웃음 섞인 답변을 얻어냈다.
朴 전총리는 또한 부인 장옥자(張玉子, 70) 여사가 자신의 병 수발을 해온 사실을 얘기하며 “일본에 있는 가족탕에서 서로 등도 밀어주고 했는데, 그때 보니깐 이 사람이 아직도 젊어요”라는 말로 좌중의 폭소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朴 전총리는 공항에서 20여분을 머문 후 곧바로 생가(生家)가 있는 부산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로 이동했다. 고향 마을 주민들이 북과 장구 등으로 풍물놀이를 하며 그를 환영하는 가운데 생가 담벽에는 “쾌유를 축하합니다”라는 플래카드도 걸려 있었다.
올 초 철골구조로 말끔하게 개축(改築)한 생가에는 김대중 대통령, 이한동 국무총리,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신국환 산자부 장관, 이인제 민주당 고문, 이상득 한나라당 사무총장 등이 귀국을 환영하며 보낸 난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朴 전총리는 생가 도착 후 아들 성빈(成彬)씨 등과 함께 선영을 찾아 귀국 인사를 했다. 성묘를 마친 그는 생가로 다시 돌아와 김동주 전위원의 사회로 약식으로 열린 ’귀국환영식‘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朴 전총리는 인사말을 통해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건강한 몸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성원해준 고향 사람들과 지인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특히 생가를 철을 이용해 새로 지은 데 대해 각별한 소회를 밝혔다. 그는 “철은 내 인생의 모든 것이었으며, ‘너는 무엇을 위해 사느냐’고 진지하게 자문할 때마다 그 답은 늘 철이었다”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홀가분해졌으니, 앞으로는 여러분들과 더 자주 만나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인사말을 끝낸 朴 전 총리는 박득표(朴得杓) 포스코 개발 회장, 안병화(安秉華) 포철동우회 회장, 황경로(黃慶老) 전 포스코경영연구소 회장 등 전직 포항제철 경영진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朴 전총리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부인 장옥자 여사와 함께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월간중앙’과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에는 조영장 전비서실장, 최재욱 전국무조정실장, 이대공(李大公) 포철교육재단 이사장 등이 배석했다.
아침 일찍 일본을 출발하면서부터 하루 종일 빠듯한 일정을 소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곤한 기색이 거의 없어 보였다.

- 9개월만에 다시 귀국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밖에 나가 있으면서도 필요하면 왔다 갔다 했는데, 그래도 이번은 감회가 좀 새로워요. 수술을 받은 뒤 처음 들르는 고향길인데 다 집도 이렇게 새로 지었고, 그동안 손자(孫子)도 하나 더 생겼거든요.”
- 공항에서부터 많은 환영객들이 나왔던데요.
“나이 들어서 큰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다길래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겠지요. 그래도 잊지 않고 반겨주는 분들이 고맙지요.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 귀국을 미룬채 계속 해외에 머무르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 “의사들이 우리나라 기후가 내 병을 치유하는데는 부적절하대요. 수술 후 회복을 위해서는 따뜻한 데 머무는게 좋다고 해서 일본 후쿠오카에 주로 머물렀습니다. 그곳은 제주도보다 더 남쪽이라 겨울에도 따뜻합니다. 김해공항까지는 비행기로 50분밖에 안 걸려 필요하면 이렇게 들어오기도 편하고요.”
-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귀국한 이유는?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찾는데 꼭 무슨 목적이 있어야 합니까. 수술을 몸을 추스르느라 지난해 추석에도 성묘(省墓)도 못했거든요. 이번 설날마저도 조상께 인사를 드리지 못하면 죄가 되기 때문에 들어온 것입니다. 아무리 막가는 세상이라도 그 정도의 도리는 하고 살아야지요.”
- 이제 완치(完治)가 되신 건가요?
“병원에서는 회복속도가 참 빠르다고 합디다. 그러나 70이 넘은 나이에 3kg가 넘는 혹은 떼니는 수술을 받았으니, 앞으로도 계속 건강에 유의하면서 지내야죠.”
- 체력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던데, 병후 회복을 위해 특별히 하시는 운동이라도 있습니까?
“나처럼 나이 든 사람이 건강을 위해 할 수 있는 운동으로는 걷기가 최고지요. 일본은 공원 같은게 잘 꾸며져 있어 걷기 운동을 하기가 참 좋습니다. 연못을 잘 가꿔놓고 그 주변을 산책할 수 있도록 만든 작은 운동장들도 많거든요. 하루에 2천~3천m씩을 꾸준히 걷는데, 그 덕분에 체력도 많이 좋아졌어요. 아까 선산에 성묘하면서 올라간 계단이 1백90개가 넘습니다. 이 정도의 나이에 그만한 높이를 쉬지 않고 한숨에 오르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지요.”
- 총리 재임때보다 체중이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만,
“조금 늘었어요. 주변에서는 수술 전보다 몸이 더 좋아진 것 아니냐며 덕담을 하는데, 체중이 너무 나가는 것도 안좋다구 해요. 그래서 요즈음 은 체중에도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 늑막섬유종 증세를 처음 안 게 언제였습니까?
“지난 1980년 서울대병원에서 진찰을 받으면서 처음 발견했습니다. 참 묘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는데, 그것을 한 20년 동안 몸안에 모시고 다닌 셈이죠.(웃음)”

- 왜 진작 수술을 하지 않았습니까?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그냥 둬도 건강에 아무 지장이 없다고 하더군요. 국내에서는 물론 일본과 미국에서도 ‘그냥 잊어버리고 지내도 괜찮다’는 소견이 나왔습니다. 그 후 1993년인가 정밀검사를 다시 한번 받았습니다. 그때는 내가 원하면 수술을 할 수도 있지만,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는 소견이 나왔지요. 그래도 ‘이것도 어느새 내 몸의 일부가 됐구나’하는 생각에서 그냥 두기로 했었지요.”

- 그렇다면 그 사이에 상태가 나빠져서 수술을 받은 건가요?
“수술을 현실적 문제로 생각하기 시작한 건 2000년 8월부터였어요. 기관지에 부담이 오는 느낌이 들어 검사를 받고 수술을 결정했지요. 코넬대학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마침 그때 늑막섬유종의 세계적 권위자가 그 병원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운이 참 좋았어요. 총리직에서 물러나 덕분에 그래도 건강을 돌볼 여유가 생겼고, 수술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면서 ‘총리직에 계속 머물렀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 수술 이후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됩니까?
“수술을 받은 뒤로는 거의 모든 일과가 건강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돌아가지요. 그저 마음 편하게 갖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운동도 하고 온천장에 가서 목욕을 자주 하면서 지냅니다. (옆에 앉은 부인 장옥자 여사를 가리키며) 수술 이후에는 내내 이 사람과 단둘이서 지내고 있지요. 나야 신혼시절 생각도 나서 좋습디다만, 나를 간호하느라 이 사람이 고생을 참 많이 했지요.”
朴 전 총리의 “결연(結緣) 존연(尊緣) 수연(隨緣)”이라는 글귀였다. 朴 전 총리의 오랜 지기(知己)인 나카소네 전 총리가, 지난해 연말 미국에서 이본으로 건너온 朴 전총리에게 건강을 기원하며 써준 것이라고 한다. 朴 전총리는 이 글을 “‘인연을 맺으면 그 인연을 존중하고, 그 인연에 따르라’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朴 전충리는 한일의원연맹 활동 등을 통해 나카소네 전 충리와는 20년 이상 인연을 맺어온 사이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일본에 머무르며 사실상 ‘정치적 망명생활’을 할 시절의 朴 전총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던 나카소네 전총리는, 요즈음도 ‘한국의 지인’으로 朴 전총리를 첫 손가락에 꼽고 있다.

- 나카고네 전총리와는 자주 만나십니까?
“그분 사정만 허락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사이죠. 지난해 연말 내가 일본으로 온다는 연락을 받고는 도착 바로 다음날 ‘건강하게 돌아와 기쁘다’며 도쿄에서 가장 유명한 요정으로 초청해 저녁을 내준 분이 바로 나카소네 총리였습니다. 참 고마운 분이죠.”

- 일본에서도 국내상황은 파악하실 것 같은데요?
“가끔식 신문을 보는정도죠.”

- 정치상황도 복장하고 경제도 어려워 국민들의 걱정이 큽니다만.
“신문을 보니깐 나도 걱정이 되더군요. 그러나 걱정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 하나 걱정한다고 사정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 엔화 가치하락으로 우리의 수출경쟁력이 저하되는 등 일본의 장기불황은 우리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현지에서 본 일본 경제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내가 무슨 대단한 석학(碩學)도 아닌데, 너무 어려운 질문 아닙니까. (웃음) 일본은 고도 성장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봐야죠, 현실적으로 일본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금융권의 부실화 문제입니다. 금융기관들이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었는데, 경기침체로 부동산 가격이 엄청나게 떨어졌거든요. 담보물의 가치 폭락으로 빌려준 돈을 받을 길이 막히면서 금융권이 연쇄적으로 부실해지고 경제불안이 가속화 된 것입니다. 일본도 이를 치유하기 위해 엄청난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있지만, 그 효과가 바로 민영화로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가 없다는 지적이 많고요. 이처럼 경제에 대한 불안감이 해소되지 않으니깐 투자도 활성화 되지 않고, 국민들도 소비를 꺼리는 악순환이 일어나 경제가 장기간에 걸쳐 침체 된 게 오늘의 일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러한 구조적 문제점을 개혁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을 업고 출범한 게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아닙니까?
“나도 고이즈미 총리가 취임할 때만 해도 일본이 여러 문제점들을 충분히 해결해낼 수 있으리라고 보았습니다. 고이즈미 총리가 원래 능력이 있는 정치인이고 일본 정계의 대부(代父) 역할을 하는 나카스네 전 총리도 강력히 후원을 하고 있거든요.”

- 그러나 고이즈미 정권 출범 1년이 다가오도록 개혁의 성과가 별로 없다는 지적이 많지 않습니까?
“관료주의의 장벽과 정파간의 이해관계 때문에 개혁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여기에다 근래 들어 고이즈미 정권의 장래를 불투명하게 하는 몇가지 사건이 생겼지요. 개혁이 부진하다는 회의론이 일면서 당내에도 반대세력이 생겨나고 있고, 다나카 마끼코 외상을 경질한 것도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80%대에 달하던 고이즈미 총리에 대한 지지도가 다나카 외상 경질 이후네는 50%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나는 이것을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이즈미 정부가 그만큼 일을 하기가 어렵게 됐다는 뜻이거든요. 이 문제는 ‘다나카를 쫓아내더니 고이즈미의 인기가 떨어졌다’거나 ‘일본 경제가 정말 안풀리는 모양이다’는 식으로 가볍게 봐서는 안된다고 봐요. 현실적으로 일본 경제에 적잖은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로서는 일본 국내사정도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 일본의 경제 구조개혁이 성공할 가능성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나는 비관론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낙관론자도 아닙니다. 일본의 상황도 좋게 볼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이 함께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원래 자존심이 강합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해서야 말이 되야’는 인식이 있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난국을 돌파해야 한다‘는 각오도 있거든요. 일본에 미치는 미국 변수도 긍정적으로 볼 부분이 있어요. 미국은 일본이 국제 무대에서 더 많은 역할을 떠맡아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 자신의 상황이 여의치를 않으니깐 ‘일본만이라도 좋아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지요. 미국의 이 같은 인식은 일본 경제회복에 적잖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두루 생각하면 일본 경제가 가까운 시일내에 살아나고, 그것이 우리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는 희망을 걸어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경제 구조개혁이 국민의 공감대나 지도자의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지요. 일본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미국 경제도 여전히 불투명하지 않습니까.”

- 최근 미국의 경기가 호전되고 있다는 분석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미국 경제가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변수가 많이 남아 있다고 봐요. ‘9.11 테러’같은 사건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몇이나 됐습니까. 그 사건 하나가 세계정세와 경제에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치리라고 누가 또 예상했습니까. 앞으로 이같은 사건이 하나만 더 일어나도 세계경제는 1930년대와 같은 공황사태를 빠져들 가능성이 큽니다. 돌발변수는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죠. 어디 그뿐입니까. 남미(南美) 경제가 여전히 불안한 가운데 최근에 독일이 급속도로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과거 동서독지역간의 불균형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후유증으로 인해 실업률이 높아지는 등 상황이 안좋게 돌아갑니다. 따라서 전 세계적으로 금년은 상황을 매우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러한 차원에서 박 전총리께서 국내에 머무르면서 경제정책 등에 대해 조언도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나는 원래 호기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그러한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를 밖에 나가서 현장에서 관찰해 보고 싶거든요. 대단히 흥미로운 상황이 많이 벌어질 것이고, 그것을 관찰하는 재미도 클 것 같애요.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대단히 송구스럽지만, 우리나라는 무엇을 처리해나가는 과정이 불투명하고 불확실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국내에서 상황을 지켜봐야 별로 흥미로울 것 같지 않아요. 그러나 일본만 해도 일을 처리해가는 과정이 아주 투명하거든요. 모든 절차가 공개적으로 전행되고, 그 과정 하나하나가 그때그때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됩니다. 현장에서 그것을 지켜보는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요.”

-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에 추진됐던 재벌개혁이나 빅딜 등 주요 경제정책이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돼 성과가 별로 없었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오늘은 그런 얘기는 안하는게 좋겠습니다. 나중에 천천히 합시다.”

- 고이즈미 정권 출범 이후 한일관계가 그전보다 더 나빠진 감이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까지 불거져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면 우리는 일본에 대해 서운함을 느끼고 분노까지 표출합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우리의 대응방식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국제관계라는게 본질적으로 상호적이지 않습니까. 상대방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가 어떤 입장에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염두에 둬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정당한 근거가 있다는 생각에서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지만, 평균적인 일본인들의 생각은 달라요. 과거사 문제는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법적으로는 물론 외교적으로도 이미 종결됐다는게 그네들의 인식입니다. 그런데도 왜 한국은 ’잊을만‘하면 과거사 문제를 또다시 거론하느냐는 게 일본인들의 생각이거든요. 이러한 점을 인식하는 것은 향후 한일간의 현안을 풀어가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일관계와 관련해 생각해 볼만한 것이 또 있습니다. 근래 들어 일본 사람들, 그 가운데에서도 한국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사람들일수록 한국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사람들이 가장 불편해하고 서운해 하는 점이, 일본을 이해하는 가운데 정치와 경제의 전면에서 활동해온 한국측 인사들이 최근 수년 사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상대방을 차지 못하고, 교과서 문제와 같은 현안이 발생해도 서로의 속내를 파악하기가 힘들어 지는 것이죠. 지한파(知韓派)까지도 짜증을 내는 경우가 흔히 있거든요.”

- 일제 강점기를 경험해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던 1세대 일본 전문가들이 대거 퇴진하면서 한일 양국간의 ’언어 소통상의 장애’를 지적하는 분들도 있던데요.
“그것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점이죠. 우리나라 전후 세대들이 일본을 체험적으로 이해하면서 일본어도 능숙하게 구사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한테 일본어를 배우도록 강요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일본인들한테 한국어를 배우라고 주문하는 것도 무리죠. 그렇다면 결론은 영어뿐이라는 얘기가 되는데, 영어는 우리보다 일본 사람들이 훨씬 더 부담을 느끼는 언어란 말이죠. 영어라면 무조건 골치 아파하는 일본사람들이 많거든요. 내가 일본의 지인들에게도 자주 하는 얘기입니다만, 이제는 세월이 흘러서 한국과 일본이 ’제3국어‘인 영어로 의사소통 할 수 밖에 없는 시대가 된 것이죠. 앞으로 한일관계에서는 이 언어문제가 중요한 고민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고 우리 나름의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도 거의 없는 것 같애요.”

- 그러한 상황속에서 한일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그것을 다 얘기하려면 몇날 며칠 밤을 새우도 모자라는데…. 우선은 자주 만나야 합니다. 서로가 얼굴부터 익혀 놔야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즈음은 서로가 상대를 만날 생각들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가 일본 모두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도 서로를 도무지 만나지를 않잖아요.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일본을 소재로 한 대화가 마무리되어갈 즈음, 朴 전총리에게 총리직 퇴임의 빌미가 됐던 ‘부동산 명의신탁 파문’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朴 전총리는 “이미 다 지나간 얘기를 지금 와서 거론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언급 자체를 꺼렸다.
그는 “내가 포철을 경영하고, 정치를 하면서 돈 문제와 관련해 결벽증에 가까운 천신을 해온 사실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며 “그때의 명의신탁 파문은 재론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라며 불쾌감을 표했다.
朴 전총리는 퇴임 직후인 2000년 10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문제가 된 땅은 부인 장옥자씨가 조모씨와 공동명의로 구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권 때 나에 대한 뒷조사를 진행하던 검찰이 실소유주가 우리 부부이면서도 이를 숨기기 위해 명의신탁을 해둔 것처럼 꾸몄다”고 해명한 바 있다.
朴 전총리는 이 파문 이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실제로 지난 2000년 연말 아현동 자택을 팔았다. 아현동집은 朴 전총리가 5‧16이후 상공(商工)담당 국가재원최고회의 위원으로 있을 때, 최고위원들 가운데 朴 전총리가 유일하게 집이 없어 지낸다는 것을 알고 준 하사금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朴 전총리는 이 집을 팔고 강남에 빌라 한 채를 전세 얻었다. 그 차액은 당초 약속대로 사회환원을 한 것으로 안다고 한 측근은 전했다.

朴泰俊 전총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경제와 정치 두 부분으로 나눠서 살펴 볼수 있다. ‘포항제철’로 상징되는 경제분야에서 그의 공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는 스스로 ‘내인생의 전부였다’고 말하는 철에 전력투구하며 ‘포철신화’와 ‘박태준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정치에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결과적으로 경제와 정치 모두에서 영욕(榮辱)을 함께 맛본 사람이 또한 그였다.
5‧16이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비서실장을 거쳐 상공담당 최고위원을 지낸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한 것은 1980년 신군부 집권 이후였다. 그는 입법회의 경제위원장을 맡은 이래 5공화국과 6공화국을 거치며 정치적 요직을 두루 거쳤다.
11‧13‧14대 국회에서 전국구 의원직을 맡으며 국회 재무위원장‧민정당 대표위원‧한일경제협회회장‧한일의원맹 한국 측 회장 등을 맡아 승승장구하던 그는,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 이후부터 정치적 시련을 겪기 시작했다. 시련의 싹은 3당 합당으로 같은 민자당 식구가 된 김영삼(YS) 대표최고위원과의 갈등이었다. 그는 민자당 후보경선과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YS의 ‘협조요청’을 거부한 끝에 1992년 10월 민자당을 탈당하고 말았다. 그가 끝내 협조를 거부했던 YS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그로서는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YS 집권 후 그 자신과 포항제철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가 행해졌다. 그가 이를 피해 해외로 ‘망명’을 떠난 사이 이른바 ‘박태준 사단’으로 일컬어지던 포항제철의 측근들이 대거 회사를 쫓겨나거나 한직으로 내쫓기는 사태가 빚어졌다.
권력무상을 실감케 하며 해외로 떠돌던 그가 정치적 명예회복과 함께 화려하게 재기한 것은 1997년이었다. 그는 그해 7월에 실시된 포항북 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고, 정계 복귀 4개월만인 97년 11월, 자민련에 입당해 총재를 맡게 된다. 그리고 그 얼마 뒤 국민회의와 자민련간의 야권 후보단일화 협상이 마무리됨으로서 김대중-김종필-박태준 3 인간의 이른 ‘DJT연합’이 성사됐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그는 2000년 1월, 김종필 총리의 후임으로 제32대 국무총리를 맡기 직전까지 자민련 총재를 맡아 공동정권의 한 축을 이끌었다. 그러나 충청권 인사들이 주류를 점하는 자민련에서 ‘고용사장’을 맡은 과정에서 마음고생을 할 때가 많았다.
자민련 총재 시절 박 전총리가 전력을 다해 성사시키려 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중선거구제 도입이었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과의 주례회동 때 이를 끈질기게 주장, 공동, 여당의 단일안으로 입법을 추진키로 동의를 얻어냈다.
그는 한 선거구에서 2,3명씩의 의원을 뽑게끔 선거법을 고쳐야만 자민련의 정치적 생존이 가능하다는 현실적 사정까지 감안해 중선거구제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그러나 자민련 내부에서는 그가 영남권 인사들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중선거구제에 매달리는 것으로 의심했다. “고용사장이 오너가 되려한다”는 노골적이 불만도 터져 나왔다. 결국 중선거구제는 김종필 총리부터 제동을 걸고 나섬으로써 끝내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중선거구제가 물건거가면서 정치에 대한 회의가 한층 높아갈 즈음, 그는 총선을 앞두고 자민련 복귀를 결정한 김종필 총리의 후임으로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당시 그는 처음에는 고사(固辭)했으나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의 거듭된 권유를 받고 더 이상 자기 입장만 내세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총리직을 수락했었다.
일단 총리직에 오른 다음부터 그는 집무실에다 유가(油價)와 주가(株價)의 일일상황표까지 붙여놓고 국정을 챙기는 등 총리직 수행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이 총리직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자민련이 ‘야당’을 선언하며 민주당과 정부를 맹렬히 공격하는 선거전략을 구사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민련 일각에서는 ‘총리직 철수를 통한 공조 철회’를 주장하며 그의 처신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속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바로 얼마전까지 그 자신이 총재를 맡았던 자민련은 교섭단체도 구성할 수 없을 정도로 참패하고 말았다. 그를 따르던 당대 영남권 인사들이 줄줄이 낙선의 고배를 마셨음은 물론이었다. 그렇게 총선이 끝나고 난지 20여일만에 ‘부동산 명의신탁’건이 불거져 나왔고, 그 와중에서 4개월여의 ‘단명총리’라는 기록을 남기고 중도하자 하게 된 것이었다.
그가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재에 대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으리라는 정황, 전후 사정이야 어떠했든 간에 불명예 퇴진에 따를 명예회복의 기회를 도모하리라는 추정, 현실적으로 영남권 정서에 일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정치적 분석 등이 두루 어우러지면서 그의 행보를 어떻게든 정치와 연관시켜 바라보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대통령 선거에서 영남권 민심의 향배가 주요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이는 지금의 상황이, 朴 전총리가 정치적 재기와 함께 대선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맡았던 지난 1997년과 흡사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인터뷰 마무리 부분의 대화는 이러한 항간의 분석에 대한 그의 입장을 중심으로 해서 주로 ‘정치’와 관련된 화제로 진행됐다.

- 이번 귀국을 정치상황과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야 정치권 인사들이 공방에서부터 대거 마중을 나왔잖습니까.
“누가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이오? 나를 환영해 준 사람들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나를 걱정하고 또 궁금해하기 때문에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큰 고생을 했다는데,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돌아오는지 보고 싶어서 온 분들이겠지요.”

- 정치는 다시 안 하실 건가요?
“내가 정치를 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꼭 지금 같은 질문을 하는 기자들 말고는 다 알아요. 그러니깐 자꾸 정치 운운하는 얘길랑은 꺼내지 말아요.”

- 그래도 자민련 총재 때는 중선거구제 도입을 위해 주장하는 등 정치에 강한 의욕을 보이셨는데요.
“정치라면 정말 진절머리가 나요. 말씀하신 중선거구제만 해도 그래요. 지금도 돈 안드는 선거를 해야 한다느니, 지역구도를 허물어야 한다느니 하며 애기들을 많이 합니다만, 이것을 실천에 옮기는 가장 현실적인 장치가 바로 중선거구제 아닙니까. 오직 한사람의 승자만 뽑는 지금 같은 소선구제에서는 승리 지상주의가 정치권을 지배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깐 막대한 자금을 살포하면서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일도 공공연히 벌어지는 것 아닙니까. 이 같은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선거구당 2,3명씩을 뽑는 중선거구제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정말 소신껏 그것을 추진 했었지요. 그런데 그게 안됐잖아요.”


- 왜 안됐습니까?
“내가 자민련 총재로 있을 때 강하게 밀어붙여서 중선거구제를 하기로 합의를 보았어요. 그랬는데 나중에 합의 된 것을 서류화해서 국회 통과절차를 밟는 과정에 이르니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냐는 듯이 전부 다 반대를 하더군요. 그래서 추진되지 못한 것입니다. 한번 생
각해 보세요. 그런 분위기에서 무슨 정치가 된단 말입니까. 그런 사람들이 아직도 현실정치에 몸담고 있는데 도대체 누구를 상대로 무슨 정치를 어떻게 한단 말이오?”

- 선거구제를 바꾸지 못한 아쉬움이 크신 모양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그때 정말로 선거구제를 바꿔야 했습니다. 그때 바꿨더라면 정치가 오늘날 이런 분위기로까지는 가지 않았을 거요.”

- 총리는 지낸 원로로서, 직접 정치는 하지 않더라도 경제나 한일 문제 등에 대해 조언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있어요? 내가 나라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현직에서 정말 애를 쓸 때, 그리고 내가 매우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을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던데…. 그랬던 나한테서 지금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아쉬워 한단 말입니까.
현실정치도 짜증이 날 텐데, 국민들이 지금 나를 생각하고 걱정해줄 짬이나 있겠어요. 그런 거짓말 말아요.(웃음)”

- 여야의 대선 주자들이 총리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으로 아는데요.
“그 사람들이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길래 나를 만나려 한단 말입니까? 나를 만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 정치적으로 도움을 얻기 위해서겠지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내가 왜 정치를 그만뒀고, 왜 정치가 진절머리가 나는지를 다 말씀을 드렸는데도 그런 얘기를 하세요? 그 분들이 뭣 때문에 나를 찾아오고, 내가 왜 그분들을 만납니까?”

- 금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 아닙니까.
“우리나라로서는 매우 중요한 선거죠. 좋은 사람이 뽑혀야 겠지요.”

- 총리 재임 시절 가장 보람 있던 일을 드신다면.
“보람이니 아쉬움이니 한 게 없어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는데, 그 짧은 기간 동안에 도대체 무엇을 느낀단 말입니까. 회의하느라 청와대 오르내리다가 그냥 지나가 버렸는데….”

- 퇴임 이후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거나 통화한 적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朴 전총리는 답변 대신 고개를 가로 저어 보였다.)

-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일본을 자주 방문합니다만, 일본에서 도착해서 무슨 연락이라도 있었습니까?
“그 사람들이 내가 무슨 필요가 있다고 전화를 하고 그러겠어요.”

- 근래의 정치상황을 보면 朴 전총리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같은데요.
“내가 필요해요? 이때 부인 장옥자 여사가 ”그만 하세요“라며 朴 전총리를 말리고 나섰다. 朴 전총리는 ”다 잊어버린지 오래이니까, 정치 얘기는 이제 그만합시다“하고 말했다.”

- 정치가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모양이죠,
“우리 같은 사람은 그렇지는 않아요. 그러나 변하는 경우가 있겠지요. 나는 ‘바를 정(正)자’ 하나를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생각도 바르게 하고, 인생살이도 바르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말 만큼 쉽지를 않거든. 간단해 보이면서도 실천하기가 정말로 어려워요. 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때가 많고 살아갈수록 더욱 그런 느낌이 더 강해진다고요. 그래도 나는 때로 배반을 당하면서도 이 ‘바를 정(正)자’ 하나는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세상살이에서도 이것이 참 필요한데, 갈수록 세상 돌아가는 게 그렇지를 못한 것 같아요.”

- 정치에 몸담은 것을 후회하십니까?
“왜 후회합니까? 나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 같은 것은 안해요.”

- 총리 퇴임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말년이 참 안 좋다고’는 얘기를 많이 하던데요,
“내가 그렇게 보여요? 이렇게 고향집도 새로 짓고 필요하면 외국도 드나들면서 인생을 즐기고 있는데. 이게 얼마나 좋습니까.”

- 회고록을 집필하실 계획은 없습니까?
“의사가 한 30년은 산다고 합디다. 그런 사람한테 회고록 쓰라면 이제그만 삶을 정리하라는 얘기 아니오. (웃음) 나는 이제까지 걸어온 길보다는 앞으로 갈 길이 회고록의 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 인터뷰에 배석했던 이대공 포항제철학원 이사장은 이 대목에서
“전기(傳記)를 쓰기 위해 작가 두 사람이 현재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 향후 활동과 관련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두신 모양입니다만.
“마음속으로 이런저런 구상을 하고 있어요. 그러나 매우 막연한 것이라서 지금 딱히 뭐라고 얘기할 단계는 아닙니다. 차차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요.”

- 곧 출국하실 계획인 것으로 아는데, 언제쯤 완전히 귀국하실 건가요?
“내가 무슨 이민을 가는 것도 아닌데 날짜를 못 박으면서 오갈 이유는 없지요.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이렇게 올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당분간은 따뜻한 곳에서 건강을 돌 볼 생각입니다.”
朴 전총리는 거실에 걸린 나카소네 전 총리의 붓글씨를 다시 한번 가리키면서 “새겨 들어야 할, 참 좋은 얘기”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朴 전총리는 9개월만에 귀국해 1주일 동안 고향집에서 머문 후 2월 18일 오후 ‘경제나 정치적으로 흥미로운 관찰거리가 많다’는 일본으로 출국했다.






첨부 파일
공공누리 제4유형: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 및 변경 금지

본 공공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페이지 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