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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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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 박태준

청암의 고향인 임랑마을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청암의 삶이 녹아있는 은유화된 건축물
그의 인생과 철학을 살펴보고 자신을 비추어 보며 사색에 잠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

군인시절

靑巖 군인이 되다

해방이 되었지만, 한반도는 이념의 대립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졌던 당시 청암은 학구열에 목말랐습니다.

“나는 그때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으니까 경성대학(서울대학)에 가서 공부를 더 할까 생각도 가지고 있었지. 그래서 서울에 한 번 가보자 해서 갔어. 근데 이게 신탁통치 반대다 뭐다 해서 좌우충돌로 싸움을 하는데 서울이란 시내가 시가 아니라 매일 싸움이더구먼.” 청암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갔지만, 폐허가 된 도쿄도 서울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청암은 귀국하여 일자리를 찾아 나섰지만 젊은 공학도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공장 하나가 없었습니다.
“직업이 있소, 뭐 갈 데가 있나. 이쪽에 와보니까(귀국해 보니까) 가만히 보니 그야말로 오합지졸이고 말이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질서의식에 대해 굉장히 강하게 인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어지러우면 정신이 없어요. 은연 중에 군대라는 곳이 사회질서를 잡아 나가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해야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은연 중에 들었단 말이야.”

청암이 생각하는 보국의 첫 실천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청암은 건국이 되면 반드시 건군이 필요하며, 새로 생긴 군대에서 새로 생긴 나라를 굳건하게 지키는 것이 젊음을 바칠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하였고, 1948년 육군사관학교 6기로 입기하여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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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우고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강행했습니다. 청암은 미아리고개 전투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막아내다 가장 나중에 한강을 건넜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전환점이 되어 대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형산강 전투를 담당하고 있던 청암은 가장 앞서 함경북도 청진까지 북진하였고, 전략적인 요충지인 화천 수력발전소를 중공군으로부터 지켜낸 용맹한 장교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목말라하던 공부에 전념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숱한 사선을 넘나들며 군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을 받으며, 청암은 강철같은 다짐을 했습니다.

“한국전쟁에 청년 장교로 참전하여 우연히,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나는 인생과 조국의 미래를 숙고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폐허의 국토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우리 민족을 천형처럼 억눌러온 절대빈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맨 먼저 좌우명을 결정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절대적 절망은 없다.’]
청암이 평생을 바치게 했다는 두 개의 좌우명. 그에게 가치 판단의 기준은 대한민국이었습니다.

1954년 일생의 동반자인 장옥자 여사와 결혼하여 다섯아이의 아버지가 된 청암에게, 가족은 힘이자 원천이었습니다. 그는 가족을 위해 더욱 엄격하게 공인의 삶을 개척했습니다.
25사단에 부임해서는 부대 내에 만연했던 부정부패와 청탁 대신 청렴한 참군인 상을 제시하여 최고의 부대로 바꿔 놓았습니다. 청암은 군정내각의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서 서구의 발전을 바라보며,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을 잘 사는 조국으로 만들기 위한 새로운 보국을 결심했습니다. 이를 위해 청암은 1963년 소장으로 예편1)하며, 16년의 군 생활을 마감하였습니다.

  1. 군인이 현역에서 예비역으로 편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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